자유게시판
문의 및 공지 > 자유게시판
 
제목 (부안관광)역 사 기 행 '광주일보 예향에 실린' 매창'을 아는가?'
작성자 장재용
작성일자 2013-08-01
조회수 1799

역 사 기 행

 


 


 

 

'이화우 흩뿌릴 제'

그녀를 세상에 각인시킨 운명의 시

 

매창(梅窓)을 아는가? 아니 계생을 아는가? 그렇다면 부안출신 여류문인 매창을아는가?

매창과계생은 동일인이다. 매창은호고,계생은 이름이다. 매창을안다면 당신은 고전문학에 관심이 있거나,조선시대의 신분제도와 여류 문인에대한 남다른 식견이 있다 하겠다. 혹여 매창이 누구인지 모르는이도 다음 시를 읽고나면 그제야 고개를 끄덕일것이다.  "이화우 흩뿌릴 제 울며잡고 이별한 님/추풍낙엽에 저도 나를 생각하는가/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매"('이화우 흩뿌릴 제')

위시의 지은이가 바로 매창(91573 ~ 1610)이다. 매창은 황진이와함께  조선의 '기생문학'을 꽃피운 대표적인 여류문인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조선의 기생문인으로 개성출신 황진이를 첫손에 꼽는다. 그러나 '이화우 흩뿌릴 제'라는 시를 접한 이들은 부안 출신의 매창을 앞자리에 거론한다. 시가 내재하고 있는 깊은 서정성과 사랑이라는 테마가 기생이라는 신분과 맞물려 묘한 울림을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생문인이라는 단어가 주는 불온함은 그리 간단치 않다. 1887년에 나온 (부안지)에는 매창에 대해 언급한 구절이 나온다. "관비 계생의 시다. 계생은 부안의 유명한 기생으로 호는 매창이다. 낙인이며 치욕이다.가혹한 수사이자, 남성위주의 봉건적 산물이기도 하다. 어쩌면 매창은 기생시인으로 상찬을 받는것보다 역사에 기록되지 않기를 바랐는지 모른다. 평범한 인간으로, 아무런 장식과 수사가 붙지 않는 자연인으로 남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녀는 계급적 한계가 강제한 삶에서 벗어나, 유유히 떠돌고 싶었을 거다.

 

 


 

매년봄 열리는 매창문화재

  유림의 제사받는 눈부신 재능

 

평일 매창공원은 한적하다. 부안군 부안읍 봉덕리 매창공원 안에 그녀의 묘가있다. 주변으로 펼쳐진 아파트숲과 이웃한 부안문화원만 없다면 공원은 잘 단장된 섬처럼 보인다.이곳은 작은 숲이다. 반 원형으로 조성된 묘지 한 가운데 수수하고 아담한 묘비가 서있다. 1917년 부안군민들의 모임인 부풍시사에서 '명원이매창지묘'라 새겨진비석을 세웠다. 이곳에서 사람들은 그녀를 기린다. 해마다 5월이면 매창 문화재가 열린단다.부안문화원 김경성 사무국장은 "전국에 여성의 이름을 딴 공원은 이곳밖에 없다"며 남다른 자부심을 드러낸다. 매창은 중인 출신 아버지와 기생 어머니 사이에서 태었다. 어머니는 부안현에 소속된 관비로 추정된다.조선시대 신분은 전적으로 어머니의 신분을 따르도록 돼 있다. 매창은 태어남과 동시에 벼슬아치들의 장식품적인 삶을 살아야하는 운명과 맞닥드려야했다. 조선시대 기생은 사회적 멸시를 받는 대표적 천출이었다. 신분이 비천한 여성의 편에서 보면 조선은 참 나쁜 국가다. 무수히 많은 여인들의 눈물과 한을 기반으로 지탱된 전형적인 봉건사회였다. 출생과 함께 규정되는 관기의 삶은 나약한 여성이 짊어지고 가기에는 가혹한 굴레였다. 그럼에도 매창은 그 운명의 굴레를 당당히벗고 세상 밖으로 나왔다. 비록 출사의 장이 양반들의 지적 허영을 위한 여흥의 공간이었다지만 그녀는 그들보다 더 시를 잘짖고 글씨를 잘썼으며 난응 잘 쳤다.조선 후기의 문인 홍만종(1643 ~ 1725)은 '소화시평'에서 이렇게 평한다. "근래에 송도의 황진이와 부안의 계생은 그 사조가 문사들과 비교하여 서로 견줄만하니 참으로 기이하다" 홍만종의 평은 그녀가 범접할수없는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구축했음을 의미한다.

 

이루지 못한 사랑

단 한 사람의 정인 유희경

 

그러나 불행하게도 매창은 사랑을 이루지 못한다. 관행과 제도에 얽매인 신분의 강고함은 그녀를 주변인으로만 머물게했다. 매창이 사랑했던 남자는 촌은(忖隱)유희경(1545 ~ 1636)이었다. 유희경은 한시에 능통한 예학의 대가였다. 비록 서자출신이지만 서경덕 문하인 남언경에게 가례를 배웠으며 사대부 상례를 주관항만큼 예법에 능통했다. 매창이 유희경을 처음 만남 건 그녀 나이 열여덟 살 무렵으로 추정된다. 부안에들른 서울 선비를 모시게 된 매창은 한눈에 그의인품과 문재를 알아본다. 28세라는 나이 차를 넘은 두 사람의 사랑은 요즘말로하면 그레이로맨스(grey romance)롤리타콤플렉스(Lolita complex)로 가벼이 치부될수도 있다. 그러나 사랑은 더러 세상의 잣대로는 이해될수 없는 그 무엇이 아니던가. 얼마후 유희경은 서울로 떠난다. 유희경이 부안에 얼마나 머물렀는지느 알수없다. 다만 만나자 이별이라는 말은 이들에게도 통용되는 별리의 법칙이었을터다. 그들이 헤어지던날 배꽃이 허공가득  흩날렸나 보다. "그대의 집은 부안에있고/ 나의 집은 서울에있어/ 그리움 사무쳐도 서로 못 보고/ 오동나무에 비 뿌릴 젠 애가 끊겨라"(매창을 생각하며) 시에는 매창을향한 유희경의 절절한 마음이 담겨있다. 그는 처음으로 '파계'를 단행할 만큼 매창을 깊이 연모했다. 매창의 감정 또한 유희경 못지않았다. 그녀는 평생 절정을 다짐한다. "애끊는 정 말로는 다할수없어 / 하룻밤 시름으로  머리카락 반이나 세워었어라/ 얼마나 괴로운지 그대가 알고 싶거든/ 금가락지 헐거워진 손가락을 보소"('규원') 그는 살이 빠질만큼  그리음이 깊었다. 아니 금가락지의 두께가 얋아질 만큼 많은 시간이 흘렀을거다. 그러나, 어찌된 영문인지 두 사람은 쉬이 만날 수 없었다. 시간은 흘러 봄날의 배꽃은 가못없이 시들고 가을의 낙엽이 비처럼 흩날렸다.

 


(매창공원 묘지석)

 

시대의 풍운아 허균과

시의 가슴 뜨겁게 나누다

 

 매창의 남자가 유희경만 있었던건 아니다. 물론 유희경이 단 한사람 정인(情人)이었던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매창은 유희경 외에 다른 많은 선비들과 신분을 넘나드는 문우의 정을 나누었다. 부안 현감이었던 심광제(1577 ~ 1624),홍길동전의 저자인 허균(1569 ~ 1618) 등과도 교유했다. 그녀는 더러 이들과 변산반도를 유람하며 시를 논했고 교분응 나눴다. 시대의 이단아였던 허균과의 관계는 자못 흥미롭다. 그와의의 관계는 충분히 세인들의 관심을 끌만하다. 그러나 두사람의 관계는 플라토닉 러브(platonic love) 이상은 아니었다.천하의 난봉꾼이었지만 허균은 진정으로 매창을 존중했다. 둘의 사귐에는 일말의 음란함이 깃들지 않았다. "허균이 조운(槽運)의 감독관으로 제수돼 해운 판관으로 부안에 왔을때, 두사람이 만났던것같아요. 아시다시피 허균은 자유분망한 사고를 지녔던 사내잖습니까/ 그러나 매창과는 우정의 관계를 나눴던것으로 문헌에 나와있습니다. 아마 허균은 누이(허난설헌)의 삶을 보면서 매창을 단순이 기생으로만은 보지 않았던것 같아요.당대 최고의 믄인 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불행한 삶을 살았던 누이의 모습에서 허균은 매창을 보았던것같아요." 부안문화원 김경성 사무국장의 말은 일견 타당해보인다. 매창이 38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떳을때 허균이 지은 시는 이를 반증한다. "아름다운 글귀는 비단을 펴는 듯하고/ 맑은 노래는 구름도 멈추게 하네/ 복숭아를 훔쳐서 인간세계로 내려오더니/ 불사약을 훔쳐서 인간 무리를 두고 떠났네/ 부용꽃 수놓은 휘장엔 등불이 어둡기만 하고/ 비취색 치마엔 향내가 아직 남아있데/ 이듬해 작은 복사꽃 필 때쯤이면/ 그 누구가 설도의 무덤곁을 찿아오려나"('매창의 죽음을 슬퍼하며') 매창은 죽어 부안의 오리정 고개 뒤편 공동묘지에 묻혔다. 생전에 그녀가 아끼던 거문고와 함께였다. 1668년 부안의 아전들은 그녀의 유작58편의 시를 모아(매창집)을 간행했다. 초여름 매창공원은 소나무,이팝나무가 드리운 그늘로 시원하다. 초록이 물드는 이곳에서 매창의 시와 생을 생각한다. 그녀의 유언은 간단했다. 생의 위안이었던 거문고와 함께 묻어달라는. "이곳을 찿는 이 들이여 ,날 기념일랑 마오. 나는, 시를 짖고 그림을 그리며 거문고를 타다 갔을 뿐..., 어차피 삶은 그런 것 아닌가. 내 무덤에 술잔도 놓지 마오. 내 이름 앞에 붙은 불온한 명패를 떼기 전에는 다가오지 마오. 나는 시인 매창이요. 나는 자존의 인간 매창이니"

 

애절한 사랑의 흔적/ 강철수 기자 사진 서울 도봉구청 제공

 


 

매창과 유희경이 400년을 넘어 사랑을 이뤘다. 지난2012년 9월 서울 도봉산 생태공원에 두 사람의 사랑을 기리는 시비가 세워졌다. 이시비는 부안군과 도봉구청이 문학성을 알리고 순고한 사랑을 기리기위해 설치했다. 가로1.2m, 세로1.7m, 크기의 빗각 모형의 시비에는 두 사람이 주고받은 대표시 '이화우'와 ' 매창을 생각하며'가 각각 새겨져 있다. 유희경은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일으킨 공로를 인정받아 종2품까지 올랐다. 도봉서원 창건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한편 부안출신의 목가시인 신석정은 직소폭포,이매창,유희경을 '부안삼절'이라 이름붙였다.

 

매창이 사랑했던 부안의 절경/ 강철수 기자

 

 

채석강

 

채석강은 변산반도에서 서해 방향으로 돌출된 지역이다. 연중 강한 바다바람의 영향으로 시루떡 모양의 지형이 형성된 곳이다. 엄청난양의 책을 정연히 쌓아아놓은 듯한 모습을 연출할 정도로 풍광이 뛰어나다. 지형적인 아름다움 뿐 아니라 해식애,해안단구,습곡등은 화산활동 연구 자료로 가치가 높다. 또한 상록활엽수의 식생이 형성되어 있으며 천연기념물 제123호 '격포리의 후박나무군락'이 있는등 식생환경도 우수하다. 채석강 일원은 해안 절경의 멋스러움과 일몰을 감상할수있는 곳이다.

 

 

내소사

 

원래 이름은 소래사였으며 633년( 선덕여왕2)신라의혜구 스님의 원력에 의해 백제 무왕때(633년) 창건된 고찰이다. 오랜 세월의 걸쳐 중수를 거듭했고 임란 때 소실된 절을 인조때 증창했다. 오늘날의 내소사는 1932년 해안선사가 현재의 장소에터를 잡고 호남 불교의 선풍을 진작 시켰다고 한다. 내소사에 이르는 600여 미터의 전나무 숲길과 대웅전 꽃살무늬 창살은 이곳의 대표적인 자랑거리다. 낙조 무렵의 전나무 숲길은 낭만적이면서도 이국적인 풍광을 선사하며 한잎 한잎 살아있는 듯한 꽃잎 문살은 다른 곳에서는 찰아볼 수 없는 절묘한 아름다움을 준다.

 

 

모항

 

변산반도 서남쪽 끝자락에 위치한 모항은 해송 숲이 펼쳐져 있고 아담한 해수욕장을 끼고있다. 부드러운 모래사장과 아름다운 단애로 이루어져 특유의 풍광을 자랑한다, 포물선 모양으로 해변을 두른 송림은 이곳을 찿는 이들에게 남다른 볼거리다. 모항 마을 주변을 끼고 도는 해안도로는 드라이브 코스로 유명하다. 해안 도로를 따라 달리다보면 '천연기념물 제122호로 지정된 호랑가시나무 군락을 볼수있다. 마을 인근에 우리나라 최초 개인 조각공원인 금구원 조각공원도 있어 외지인의 발길을 재촉한다.


평일 매창공원은 한적하다. 반달형으로 조성된 묘지 한가운데 아담한 묘비가 서있다.

 

위 기사를 광주일보 월간지 예향에 기사를 내어주신 관계자여러분과 강철수 국장님에게 감사드립니다

-광주일보 부안주재 장재용 기자 -

월간지 '예향8월호'에서

이름 비밀번호



* 한글 1000자 까지만 입력가능 :
관리자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 210.91..xxx.xxx 2013-08-06 07:13:50
Eduardo I think you hit a buyelsle there fellas! | 176.193.xxx.xxx 2015-03-24 18:46:46
Kentaro That really caruepts the spirit of it. Thanks for posting. | 78.23.5.xxx.xxx 2015-03-25 01:38:41
David It's good to see someone thinikng it through. http://rhogzlqep.com [url=http://yarvqhphttg.com]yarvqhphttg[/url] [link=http://efejheslr.com]efejheslr[/link] | 117.166.xxx.xxx 2015-03-25 22:18:19